- 노동운동가 故 전태일 열사 50주기
1970년 11월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故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올해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50년, 한국 노동운동은 전태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대한민국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쓰였고 그만큼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한채 일터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다. 전태일 또한 그랬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신문팔이, 구두닦이, 삼발이장사 등 잡일들을 하며 살아온 전태일에게 재단사라는 직업이 주어졌지만 그가 일하게 될 근로환경은 참담 그 자체였다.
창문이나 환풍기도 없는 곳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해 고작 커피 한 잔 값을 벌어가는 열악한 노동 환경이 전태일은 부당하다고 느꼈고 나라에서 정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당시 근로기준법은 하루 최대 8시간 근무에 일주일에 한번은 휴일이 있어야 하며 모든 근로자에게 건강진단을 받게 해준다는, 현실 속 상황과는 매우 다른 얘기였다.
그렇게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는 민주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근로조건이 개선되기는 커녕 사업주의 횡포와 노동청의 외면을 받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라는 말과 함께 희생하였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사회가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높이기 시작했고 많은 근로환경들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의 희생을 두고 2009년 발행된 인권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꼽히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에는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말을 인용해 “전태일은 횃불이었다”고 표현한다. “사회의 가려진 얼굴을 들추어낸 횃불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횃불이다.”라고 말했다.
전태일은 스물 두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사회의 감춰진 얼굴들을 들추어냈다. 그의 희생정신으로 지금의 노조가 존재하며 우리는 개선된 근로환경을 누리고 있다.
노동운동에 한 획을 그은 故 전태일의 5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2019년 4월 종로구에 전태일 기념관을 개관한데에 이어 2020년 6월 17일 전태일 50주기 추모 6차 캠페인이 서울 종로구 전태일 다리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그의 희생 뒤로 5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전태일’을 기억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webmaster@kkobbinews.com